다른 대륙

2023. 8. 24. 11:21창작

공격해올 때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어. 카페 구석에 앉은 세진이 말한다. 그건 자기 탓이 아니야. 나는 주먹에 힘을 쥐고 대답한다. 아니, 모든 붕괴는 내 잘못이야. 내가 세계에 참여한 이상 내 책임이니까. 나는 전쟁이 일어나도 무기 하나 쥐어주지 못하니까. 어쩌면 나는 과거의 내 목소리에 파묻혀 미래를 숨죽여왔는지도 모르겠다, 소리도 없이. 세진은 눈꼬리를 내리며 희미한 미소로 답한다. 아니, 자기는 더 이상 가벼운 말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야. 눈을 떴을 때 보이는 모든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는, 살아보자. 그럼 다음에 봐, 안녕. 그녀는 일어서며 가방을 동여맸다. 나는 떠나는 그녀에게 3일 후 도착할 편지를 쓴다.

“어느덧 겨울이 온 듯 나뭇가지는 휘청였고, 나는 아직도 동굴 속에서 발버둥 친다. 미안해, 당신의 설득은 실패한 것 같아. 그리고 고마워, 애써줘서. 허우적대는 나를 누군가 발견해주기를, 이미 떠났다면, 흙을 덮어주기를, 안녕.”

타히티 섬에 도착한 걸 눈치챈 건 저녁 6시가 넘도록 해가 저물지 않은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알아챌 즈음이다. 퍼즐을 맞추며 시간을 때운 운전기사 제임스는 빠른 템포의 노래를 틀고 싶어한다. 음, 너무 통통 튀는 음악은 곤란한데요. 나의 말에 그는 레게 풍의 오래된 노래를 대신 튼다. 어디쯤 내려주면 되는 거지? 그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한다. 조명이 닿지 않는 곳이면 어디든지요. 무심한 창밖을 보며 나는 대답한다.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디로 가려는 건가? 답장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의 목소리는 힘이 빠져 있다. 제 느낌을 부정할 수 있는 곳에서 태어났으니 제 느낌을 풀어놓을 수 있는 곳으로 흘러 들어가고 싶은데요. 나의 대답을 듣자마자 그는 구레나룻을 살짝 긁으며 말한다. 느낌이라... 혹시 감정을 말하는 거라면, 자네는 아마도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싶은가 보지? 글쎄요, 제게 감정이란 쉽게 오고 나가는 복잡한 녀석이라 신뢰하긴 힘들어요, 그래서 느낌과는 달라요, 요 녀석은 언제나 한결같았거든요. 물 한 병을 비우며 대답을 길게 한 나는 곧장 질문한다. 혹시 아침에 들은 음악을 또 듣게 될 때 어떤 느낌을 받으시죠? 그야 당장 노래를 바꿔야겠다는 느낌, 어쨌건 당장 벗어나고 싶어. 그는 당연한 듯이 바로 대답한다. 바로 그거에요. 저는 머물러 있고 싶어요. 결국 그 노래로 돌아오게 될 걸 아니까요. 그럼 저는 다양한 감정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려요. 애써 밀어냈지만 다시 돌아왔다는 기특함,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노래가 자아낸 독특한 분위기에 붙들렸다는 무력감, 숙명에 가까운 답답함이 찾아와요. 어쩌면 그 느낌이란 건 원래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태초에 하나였던 느낌에서 출발해 분열이라는 갈등을 겪고 서로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구분된 걸지도 몰라요. 이야기를 들은 그의 고뇌가 처음으로 짙어진다. 음...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이야기라 말이야, 조금 당황스럽네. 잠시 기다려주겠나? 그래도 비슷한 게 떠오르려 하거든. 그렇게 언뜻 자신에 관해 생각하는 듯 하지만, 서로를 깊이 의식할 때의 적막함이 흘러갔다.

아! 그래, 자네는 나와는 다른 결로 이해하는 존재군. 아주 먼 과거의 이야기야. 바벨탑 설화인데, 들어본 적 있나? 그가 꺼낸 이야기의 주제가 흥미로워 나는 단숨에 말을 이어갔다. 네, 인간들이 탑을 쌓아 천국에 닿으려 하자 그 오만함에 분노한 야훼가 모든 인간의 말을 제각각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는 바람에 혼돈을 의미하는 바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죠. 그가 핸들을 돌리며 조심스레 묻는다. 바벨탑처럼, 자네가 말하는 느낌이라는 건 바로 그 고유함 때문에 남들과 다르게 점점 커져서 마침내 서로를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나는 중얼거리듯 낮게 말한다. 결국 감정으로 돌아와야 타인을, 세상을 이해할 단서를 조금이라도 얻게 된다는 말인가요? 그는 아까보다 고양된 목소리로 돌아온다. 감정에 약간의 기대를 걸어보는 게 어때? 다른 감정으로 아무리 흩어져도 자네가 말한, 그 태초의 존재 말이야. 그게 감정이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원시의 그 감정이 세대의 대물림 속에 분열의 길을 밟았다면, 이제는 그 감정들을 통합하는 시선을 갖는 거야, 물론 버겁고 때로는 지치는 일이겠지. 목적지에 도착한 걸 깨닫고 나는 제법 속도감 있게 대답한다. 감정의 대리인이 존재한다면 좋을 텐데 말이죠, 느낌 자체가 고통의 원흉이라 믿고 살아왔는데, 그건 사실 감정을 하나로 보려는 노력을 하지 못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니, 제 생각이 바뀌긴 하는 것 같아요. ...여기서 세워주실래요? 앞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이 반짝인다. 동굴까지 안 가도 괜찮을까? 나는 카드를 내밀며 얇은 코트 단추를 단단히 동여맨다. 아직 정리할 감정과 그것을 기억해줄 사람이 남아 있어서요. 날이 늦어서 여기서 자고 내일 돌아가고 싶네요. 다음에 봬요, 안녕.

'창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독의 도전  (5) 2023.09.03
사망꾼-장례식을 기념하며 남긴 사진-  (0) 2023.08.27
의고  (0) 2023.08.26
감성 해커의 자전거(2)  (0) 2023.08.24